'목포의 눈물' 애잔한 포구… 영욕의 500년 속으로 '시간 여행'

입력 2018-03-04 15:19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4> 다도해 2000개 섬으로 통하는 길목 목포와 고하도(上)

유달산 올라 다도해 보면
꽉 막힌 가슴이 ‘뻥’

쇠락한 소읍같은 목포 원도심엔
남도의 맛·멋·흥 ‘속살’ 그대로




목포는 통로다. 내륙과 다도해 2000여 개 섬을 이어주는 허브. 호남선 종착지인 목포는 끊어진 남북 철도가 다시 이어지면 유라시아 대륙 횡단 열차의 출발지가 된다. 목포는 대양과 대륙을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목포는 또 시간 여행자의 통로다. 목포 원도심에 있는 수많은 일제 강점기 근대 건축물을 따라가다 보면 길은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까지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담이 전하는 유달산 노적봉과 장군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며 전함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군량미를 비축했던 목포의 섬 고하도가 거기 있다. 근대도시로 알려진 목포지만 실상 목포의 역사는 근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항장 목포의 근대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사람들은 목포의 유장한 역사를 잊곤 한다.

지금은 KTX 열차를 타면 서울에서 목포까지 2시간 남짓이면 족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목포를 멀게만 느낀다. 심리적 거리감 때문이다. 이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묘책은 무엇일까. 일단 떠나고 보는 것이다.

나무처럼 생긴 땅끝에 있는 포구 목포

목포의 한자어는 나무 목(木)에 개 포(浦)다. 그래서 나무가 많은 포구라 목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산이 많지 않은 지역이니 별 근거 없는 소리다. 또 황해 바다와 영산강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포구라 목포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또한 부족한 해석이다. 그보다는 목포의 지형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봐야 옳을 듯하다. 목포는 영산강과 황해 바다가 만나는 지점, 기다란 목처럼 돌출된 무안반도 끝자락에 있는 포구다. 목처럼 생긴 지형의 끝에 있는 포구여서 목포라 했을 것이다. 목포의 옛 이름이 목개인 것이 그 증거다. 목포와 한 몸 같은 남도의 젖줄, 영산강에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황해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나주의 영산포까지 흑산도 홍어배가 오갔다. 1977년 영산강 하구언 제방 공사를 시작하며 영산강 뱃길은 영영 끊기고 말았다. 현재는 제방으로 인해 강물도 썩어가고 있다. 영산강 하구언 제방을 트고 다시 뱃길을 연다면 목포 또한 융성했던 옛날의 영화를 되찾게 되리라.

목포 역사의 뿌리를 알려주는 유적은 만호동의 목포진(전남문화재자료 제137호)이다. 세종대왕 때인 1439년 설치된 목포 수군진은 수군만호(萬戶)가 다스렸다 해서 만호진이라고도 한다. 목포진 성은 1500년(연산군6년) 건설을 시작해 1502년에 완성됐고, 1895년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영될 때 함께 폐진됐다. 목포진은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무안감리서·일본영사관·해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진지 주변은 영국영사관 부지로 편입됐다가, 일제강점기에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이제 목포진의 성이나 유적은 간데없고 ‘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관아 건물은 근래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미곡과 면화 등의 수탈 통로

조선시대 무안 땅에 속했던 목포는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주목을 받다가 1897년 10월1일 개항했다. 개항 후 목포에는 이주민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는 먼저 개항이 됐던 부산의 기술자와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의 흔적이 유달산 기슭 온금동 뒷산 장사바위에 새겨진 ‘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라 쓰인 암각 비문이다. 경상도 이주민들이 야유회를 한 뒤 새긴 것이다. 이런 흔적은 또 있다. 목포의 대표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쑥굴래 또한 본산지는 경상도 밀양이다. 밀양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가져온 음식이 목포 음식이 된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생각보다 가깝고 한 뿌리로 이어져 있다. 전남 하의도가 고향인 김대중 대통령의 본관은 경상도 김해다. 전남 보길도가 고향인 나그네의 시조 또한 경상도 진주 사람이다. 정치 모리배들이 조장하지만 않았다면 지역감정이란 괴물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본래 우리는 섞이고 섞여 한 뿌리로 엉켜서 살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목포는 호남지방의 미곡과 면화, 소금 등의 수탈 통로였다. 목포가 몸집을 불린 것은 식민지 수탈 과정에서였다. 1930-1940년대에 목포는 전국 3대 무역항이자 전국 6대 도시가 됐다. 하지만 해방 후 야당도시로 각인되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받고 소외됐으며 내내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교통 운송 시설의 발달로 무역항 기능마저 약화된 데다 목포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한 축이었던 다도해 섬 지역의 인구들이 대도시로 유출되면서 목포의 쇠락은 더욱 가속화됐다. 그래서 목포 원도심의 풍경은 30~40년 전의 그 시간대에 멈춰버린 듯하다. 목포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시간여행을 온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근대 건축물과 고유의 맛집 모여 있어

오랜 시간 정체돼 쇠락한 소읍 같은 곳이지만 그 덕에 목포역과 목포항 사이 원도심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고 있다. 원도심에는 문화재급 근대 건축들만 30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도시는 100년 전부터 자라난 역사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낡을 대로 낡아서 더 아름다운 목포. 또 근대 건축물만큼이나 소중한 목포의 자산은 토속 음식들이다. 목포의 고유한 맛을 보존하고 있는 식당은 대부분 원도심에 모여 있다. 목포 대표 음식인 민어 횟집거리와 싸고 푸짐하고 맛깔스런 백반집들도 다 여기 모여 있다. 홍어 횟집과 깊은 맛의 장어탕, 꽃게살 비빔밥집, 겨울 별미 삼치횟집들도 이곳에 있다.


게다가 원도심의 여객선 터미널 부근에는 수협 위판장도 있는데 어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면 바다에서 갓 잡아온 갈치와 조기, 삼치, 병어 같은 온갖 수산물이 산처럼 쌓인다. 경매가 시작되면 조금이라도 싼값에 좋은 물건을 사려는 상인들로 위판장은 떠들썩하다. 이방의 여행자들 눈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도심 한복판 선창가에 이런 위판장이 있다는 것은 관광 상품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이런 관광 코스는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도 결코 만들 수 없는 목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조만간 이 위판장이 이전되고 대신 수변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공원과 위판장, 어느 것이 보다 큰 관광자원일까? 어느 것이 관광객들에게 목포다운 감동을 더 많이 주게 될까. 목포가 원도심에서 이 소중한 자원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목포 원도심의 토속적인 맛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바로 이 위판장의 존재 덕이다. 바로 옆의 위판장에서 값싸고 질 좋은 수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손님이 많지 않아도 원도심의 식당들이 원재료의 맛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벽 위판장의 경매를 구경한 뒤 근처 식당에서 먹는 속풀이 장어탕이나 복국의 맛은 목포 원도심만이 줄 수 있는 허기진 생에 대한 위로이자 크나큰 선물이다.

노적봉의 전설이 남아 있는 유달산

목포를 상징하는 풍경은 이순신 장군과 노적봉 전설이 서린 유달산(228m)과 영산강, 삼학도, 갓바위 등이다. 홍어와 낙지, 민어 등 먹거리들도 목포의 상징이다. 유달산은 노령산맥이 바닷가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이다. 노량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니 그 의미는 사뭇 깊다. 유달산은 '영달산'이라고도 하는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달산이란 이름처럼 유달산 곳곳은 전설의 고향이다. 유달산 제일봉인 일등바위는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육도 바위라고도 한다. 또 심판받은 영혼이 이동한다는 이등바위도 있다. 전망 좋은 곳마다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소요정 등의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정자들과 완만한 유달산 능선에서 다도해 전경을 감상하면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과연 영달산이다!


유달산 초입의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뜨물처럼 보이게 했다는 설화와 일맥상통한다. 노적봉 전설은 목포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산재해 전승되고 있는 장수의 지략담이다. 경북 의성군 비봉산(飛鳳山)의 노적봉 전설도 유달산 노적봉과 같은데 삼한 시대 소문국왕이 적에게 포위를 당해 식량이 떨어지자 짚으로 산봉우리를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변협은 경기 덕소에, 권율은 행주산성에 노적봉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세 처녀와 수도승 간의 비극적 사랑 삼학도

삼학도 또한 목포의 상징이다. 삼학도란 나란히 있는 대, 중, 소, 삼학도 세 개의 섬을 일컫는다. 삼학도가 목포의 상징이 된 것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삼학도는 본래 무인도였다. 조선시대 목포진이 설치된 뒤 삼학도는 목포진에서 사용할 땔나무 공급지가 됐다. 관방의 부속지가 된 뒤 삼학도에는 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1895년 국유지인 삼학도 전체가 목포진 관리였던 김득추에 의해 일본인 삽곡용량에게 불법 매매됐다. 조선정부에서는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한일합방이 되면서 그대로 일본인 소유가 돼버렸다. 삼학도 암매 사건은 일제에 의한 목포 토지수탈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965년 세 섬 사이가 매립되면서 삼학도는 섬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2000년부터 삼학도 공원화 사업이 시작돼 15년의 공사와 1000억원의 예산이 들어간 끝에 삼학도는 다시 섬의 모양을 갖추게 됐다.

삼학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세 처녀와 수도승 간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다. 전설은 이렇다. 유달산에 잘생긴 수도승이 있었는데 섬에 사는 세 처녀가 그를 흠모했다. 마침내 처녀들이 수도승을 찾아와 사랑을 애걸했으나 수도승은 거절했다. 그래서 세 처녀는 배를 타고 각자 자신의 고향 섬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수도에 방해될 것을 염려한 수도승이 활을 쏘아 배들을 가라앉혀버렸다. 그 자리에서 세 개의 섬이 솟아났는데 그것이 삼학도다. 실상 수도승이 맞춘 과녁은 세 처녀가 아니라 자신의 내재된 욕망이었을 것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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